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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와 살인마가 마주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싶어 보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혼란스러운 영화였습니다.
특히 김병수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장면을 다시 의심하게 됐습니다.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병수가 만들어낸 기억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스릴이었던 것 같습니다.
살인자의 기억법, 살인마가 서로를 알아본 순간
김병수는 평범한 노인이 아닙니다. 과거부터 자신이 나쁘다고 판단한 사람들을 죽여온 연쇄살인범이었지만, 알츠하이머가 시작되면서 점점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 병수 앞에 태주라는 남자가 나타납니다. 태주는 최근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의심받는 인물이지만, 겉으로는 평범한 경찰입니다. 병수는 우연히 태주와 접촉사고를 낸 뒤 그에게서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태주 역시 병수를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상당히 재미있어집니다.
병수는 태주가 살인마라고 확신하지만 자신의 기억은 계속 흐려집니다. 반대로 태주는 병수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챘다는 것을 눈치채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데 한쪽은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설정 때문에 관객 역시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워집니다.
안소장이 태주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소름 돋았던 이유
제가 가장 소름 돋았던 장면은 안소장이 태주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어두운 밀실에서 병수와 몰래 통화를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태주가 안소장의 등 뒤에 나타납니다. 갑자기 나타나는 방식 자체도 무서웠지만, 그 순간 태주의 표정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태주 역을 맡은 김남길 배우의 눈빛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남을 속이고 난 뒤 고개를 돌리거나 혼자 생각하는 순간 눈빛이 갑자기 공허해지는 느낌이 있었는데, 마치 동공에서 빛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여서 오히려 큰 동작보다 더 섬뜩하게 느껴졌습니다.
살인마라는 사실을 대놓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렇지 않은 얼굴과 공허한 눈빛으로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는 연기가 이 캐릭터를 더 무섭게 만든 것 같습니다.
알츠하이머 때문에 무엇이 진짜인지 계속 의심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설정은 병수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살인마인 병수가 또 다른 살인마 태주를 알아본다는 구도로 생각했는데, 병수의 기억이 점점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태주가 실제 살인마가 맞는지, 아니면 병수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면서 만들어낸 인물인지까지 의심하게 됩니다. 최근 발생한 살인 사건 역시 정말 태주가 저지른 것인지, 혹은 병수가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것은 아닌지 계속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히 범인을 찾아가는 스릴러가 아니라 주인공의 기억 자체를 믿을 수 없는 상태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병수가 딸 은희를 보호하기 위해 누나가 있는 수녀원으로 보내는 장면에서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병수는 누나에게 은희를 부탁하지만, 알고 보니 그 누나는 이미 어린 시절 자살했고 수녀원 역시 오래전에 사라진 폐허였습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복선이 있었습니다. 영화 내내 병수만 누나를 만나고, 누나 역시 병수와만 대화를 나눴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을 알고 나면 앞에서 봤던 장면들까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방금까지 보고 있던 사람이 실제 인물이었는지, 병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는지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것이죠.
두 살인마에게는 불우했던 유년시절이 있었다
영화를 보다 보니 두 사람의 공통점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병수와 태주 모두 어린 시절 가족에게 폭력을 경험했다는 점입니다.
병수는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며 자랐고, 태주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당했던 과거가 있습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상처를 받은 인물들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종종 범죄심리학이나 프로파일링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실제 범죄자의 과거를 살펴보면 어린 시절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거나 폭력에 노출된 경우가 종종 나오는데, 그렇다고 해서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모두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겠죠.
다만 어린 시절 가족과의 관계를 통해 사람을 믿는 방법이나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생각하게 됩니다.
병수와 태주의 과거를 보고 있으면 두 사람이 왜 타인을 자신의 방식으로 판단하고,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단순히 괴물 같은 살인마라고만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만들어진 과정에도 분명한 상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살인마와 살인마의 대결보다 더 무서웠던 기억
처음에는 두 살인마가 서로를 알아보고 맞붙는다는 설정이 가장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병수와 태주가 서로를 의심하고 태주가 병수의 딸 은희를 약점으로 이용하면서 긴장감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오히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두 사람의 대결보다 병수의 기억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기억이란 내가 경험한 일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면 내가 보고 있는 현실까지 의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수녀원 장면처럼 뒤늦게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앞서 지나간 장면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단순히 범인을 추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금 이 장면은 진짜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결국 《살인자의 기억법》은 살인마가 누구인지 찾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을 함께 의심하게 만드는 스릴러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살인마의 유년시절을 보고 나니 단순히 악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이야기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만들어낼 수 있고, 어린 시절 가족과의 관계가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기는지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마지막까지도 내가 본 것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확신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제목 그대로 ‘살인자의 기억’이라는 설정을 제대로 활용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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